녹용 부위별 효능 및 복용방법과 녹용 가격

녹용 부위별 효능 및 복용방법과 녹용 가격


그 시절 화폐, 왜 냥이라고 불렀을까?
그 시절 화폐, 왜 냥이라고 불렀을까?

그 시절 화폐, 왜 냥이라고 불렀을까?

냥(兩)은 사실 무게를 재는 단위입니다. 그 시절에는 지금처럼 종이 화폐가 없었기 때문 무겁다는 금속이나 물물 거래용 물품이 화폐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많은 돈을 가지고 다닐수록 무겁다는 짐을 지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무게 단위인 냥이 화폐를 세는 단위안 사용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가장 흔히 알려져 있는 조선시대의 ”상평통보”는 조선시대 중기에 처음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이 엽전이 등장한 이후에도 냥은 지속해서 화폐를 세는 단위안 사용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화폐를 세는 개념은 냥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푼과 전, 그리고 관과 문도 있었습니다.

노리개
노리개

노리개

노리개의 가격은 기와집 1 채보다. 비싼 것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노리개에는 당시의 금은보화였던 진주와 옥, 황금 등이 사용되었기 때문 당연히 비쌌을 것입니다. 노리개란 전적으로 여성의 몸치장 목적으로만 한복 저고리에 달았었던 일종의 액세서리입니다. 즉 저고리 끝에 집 한 채를 걸고 다닌다는 의미입니다. 요즘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고급 상품 토트백 정도일 텐데, 아무리 비싼 명품백도 집 한 채의 가격까지 나가는 것은 없습니다.

고급 상품 시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말 1 필

조선시대에는 그야말로 애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오늘날의 차의 개념이지요. 차 값이 차종별로 상이하듯 말 역수고하다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건강한 말 1 필을 40냥에 구매했다고 합니다. 당일 날로 환산하면 336만 원 정도 되니 상경험한 고가입니다. 말은 이동수단이긴 그런데 엄연한 가축입니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가치는 천차만별이었을 것이라 보는 것이 맞을 것 같습니다.

주막 숙박비

주막은 식사를 하는 곳이기도 했지만 여관의 역할도 했었던 곳입니다. 방 하나를 빌리는 데에 1일 1푼이었다고 합니다. 숙박비가 식비보다. 싸다니 정말 신기할 따름입니다. 1푼이면 840원 정도 되니 더욱더 놀랍습니다. 위에 살펴본 초가집의 가격에서도 알 수 있듯, 조선시대의 부동산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시면 안 되겠습니다. 역시나 먹고사는 것이 훨씬 더 소중한 시대였습니다.

초류(草類)

[DCI]ITKC_BT_1433A_0280_010_0050_2007_003_XML DCI복사 URL복사 인삼(人葠) 인삼은 백제(百濟)의 것을 중하게 치는데, 형체가 가증가하고 단단하며 희다. 기운과 맛은 상당(上黨)에서 나는 것보다. 박(薄)합니다. 다음으로는 고려의 것을 쓰는데, 고려는 바로 요동(遼東)으로, 형체가 크고 허(虛)하며 연(軟)하여 백제안 인삼만 못합니다. 백제는 지금 고려에 신속(臣屬)되었는바, 고려에서 바치는 인삼에는 두 가지 종류가 겸해 있으니, 어느 것을 취에 쓰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쓰기에는 모두 상당에서 나는 인삼만 못합니다.

금 한 돈 시세 , 금의 단위 k?

그리고 보통 금을 24k, 18k, 15k 이렇게 분류하는데요. 간단히 말해 24k는 순금입니다. 그리고 금의 함유량이 낮은 순으로 18k, 14k가 되지요. 왜 굳이 순금을 놔두고 18k 14k가 존재하냐?

물론 금함유량이 높을수록 고가의 가치를 지니나 순금은 강도가 단단하지 않고 무른 편입니다. 때문 보석등 장신구용으로 쓰기 적합하진 않은데요. 해서 다른 금속과 섞어 18k등의 함량으로 활용하는 것입니다.

(18k는 18/24, 즉 75%가 순금비율이고 14k는 14/24, 58%가량이 순금이란 뜻입니다.

봉이 김선달을 읽어보시면 1냥짜리 닭을 봉황이라 속여 10냥에 팔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기서 닭의 시세를 유추해 볼 수 있겠습니다. 현재 활기찬 닭은 품종과 성별에 따라 다채로운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최저가인 6천 원과 최고가인 15만 원을 기준으로 하여 계산해 보시면 다소 7만 8천 원 정도가 됩니다. 위에 유추한 1냥의 가격과 제법 비슷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봉황처럼 보일법할 닭이었으니 제법 용량이 있는 닭이었을 것입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2전에 닭을 한 마리 구매했다는 내용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2 전이면 0.2냥이니 16,800원 정도입니다. ”닭 한 마리를 잡아 대접한다”라는 말이 얼마나 큰 환대였는지를 새삼 느끼게 하는 부분입니다.

마치며

오늘은 문득 궁금해진 조선 시대의 화폐가치관 및 물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인상적이었던 부분 숙박비 및 주택의 가격보다는 식비 항목의 물가가 높았다는 부분이며, 손바닥만 한 노리개가 말 1 필, 집 1 채보다. 비싸다는 부분이었습니다. 붓과 벼루의 가격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의 계급 구조 계급사미팅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누군가는 당장 먹고살 것이 없어서 산에 올라가 나무뿌리를 깎아 연명하는데, 누군가는 쌀 몇 섬에 해당하는 폐물을 선택하고 있었다니, 오늘날의 빈부격차는 감히 견줄 수도 없는 모습입니다.

당일 포스팅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재미있게 읽으셨기를 바라겠습니다.

관련 FAQ 항상 묻는 질문

그 시절 화폐, 왜 냥이라고

냥은 사실 무게를 재는 단위입니다.

노리개

노리개의 가격은 기와집 1 채보다.

말 1 필

조선시대에는 그야말로 애마를 타고 다녔습니다.